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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실크로드기행⑤하서주랑과 둔황 /매일종교신문 이치란 박사



















▲ 둔황 막고굴 앞에선 필자 이치란 박사.     © 매일종교신문


다양한 종교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고 추정되는 국제타운

실크로드선상에서 하서주랑(河西走廊)은 매우 중요한 통로이다. 동쪽은 오초령에서 시작해서 서쪽은 옥문관(玉門關)에 이르기까지이다. 하서주랑은 남산인 기련산(祁連山)과 아미금산과 북산인 마종산(馬鬃山), 합려산(合黎山) 및 용수산(龍首山)) 사이의 길이 약 900km, 폭 수km에서 100km에 이르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늘어선 좁고 긴 평지를 말한다. 이 지역은 간쑤성의 성도인 난주와 하서사군(河西四郡)인 우에위(武威), 장예(張掖), 주취안(酒泉), 둔황(敦煌)을 포괄한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은 한족,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이 현재도 함께 어울려서 살고 있다. 하서주랑은 중국 한나라에서 서역인 신장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이다. 고대 실크로드 시대에는 중국의 관문을 통과하는 지역으로 고대 중국과 서역과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진행시킨 국제통로였다.
 
이 길을 통해서 시안(西安)에서 타림분지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서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에 이르렀고, 결국에는 페르시아와 로마까지 이르게 되는 실크로드의 간선도로였다. 파르티아는 오늘날의 이란 북동부에 해당하는 파르티아 제국(247 BC–224 AD)으로 실크로드 선상에서 중계무역 세력권을 갖고 있었다.
 
하서주랑은 중국 한나라가 개척하기 전에는 월지가 장악하고 있었다. 월지는 우순(烏孫)과 티베트-버마 계통의 강(羌)족을 제압하고 이 지역을 석권했다. 이에 우순은 서북지역으로 달아났고, 강족은 기련산 쪽으로 후퇴했다. 이 무렵 흉노가 몽골초원에서 세력을 형성해서 흉노제국이 세워졌고, 북흉노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서 이곳에 있던 월지를 물리친 것이다. 북흉노는 하서주랑 통로와 둔황일대를 손에 넣고, 타림분지의 오아시스와 천산 기련산 곤륜산 초원까지가 그들의 판도아래 있게 했다.
 
하서주랑에서 가장 포인트는 둔황이다. 현재 둔황은 중국에서 군(郡)정도 급의 도시이다. 간쑤성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둔황은 고대 실크로드의 가장 중요한 정거장과 같은 곳이다. 둔황하면 모가오쿠(막고굴 莫高窟)이다. 막고굴은 천불동(千佛洞)이 대표적이다. 














▲ 간쑤성의 중부와 서부지역을 차지하는 하서주랑.     © 매일종교신문


1987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둔황석굴이라고 부르고 관심 있는 분들이 꾸준히 찾고 있는 불교문화 관광지이다. 사람들이 둔황을 찾으면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月牙泉)과 사막으로 형성된 명사산(鳴沙山)을 구경하고 다음은 둔황의 하일라이트인 막고굴을 찾아서 불교문화유산을 감상하게 된다. 둔황은 오아시스인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과 모래가 노래한다는 명사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둔황은 고대시대에 남쪽 실크로드상의 교차로에 위치해서 매우 전략적인 곳이었다. 둔황은 티베트의 라싸와 몽골 남 시베리아로 통하는 주된 도로였다. 또한 좁은 하서주랑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했는데, 이 길은 바로 북중국의 평원과 고대 중국의 수도 장안과 낙양으로 들어가는 심장부였기에 매우 중요한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요충지였다. 둔황지역은 기원전 2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사는 곳이었는데, 그들은 티베트-버마 계통의 강(羌)족이다.《史記》에 의하면 이곳은 한때 월지(Yuezhi月氏)족의 고향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 월아천과 명사산(필자 촬영).     © 매일종교신문


전회에서도 살펴봤듯이 한 무제는 장건으로 하여금 서역을 개척케 하고 위청과 곽거병 장군으로 하여금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이 지역을 평정했다. 둔황은 전한 때, 다른 세 곳과 함께 최 일선의 수비대 지역이었다. 한 무제가 흉노를 물리치고 요새화한 곳이었지만, 항상 북방 이민족들에게 시달린 지역이었다. 둔황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였고, 남북 실크로드의 교착지점이었다. 둔황은 무역의 중심지역이기도 했는데, 중국 티베트 몽골의 무역상과 서쪽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온 캐러밴들과의 무역 중계지점으로서 일단 멈춤을 한 장소였다. 수. 당시대에는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선상에서의 교섭의 허브 역할을 한 곳이다. 특히 1세기 전후 서역에서 온 불교승려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이곳을 경유했고, 상당히 규모가 큰 불교공동체가 발달되었던 곳이다. 둔황 막고굴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굴이지만, 처음엔 승려들의 명상을 위한 목적으로 바위를 깎고 돌을 파내어서 만든 동굴이었다. 나중에 불상숭배와 성지순례 객을 위한 동굴사원으로 발달했다. 나중에는 이른바 천불동이라 하여 많은 동굴이 만들어지고, 일종의 동굴 사원군(群)으로 발전하여 타운을 형성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다.
 
불교가 주류 종교였지만, 기독교 유태교와 마니교의 성경을 포함한 인공물들이 발견된 것을 보면 실크로드상의 다양한 종교의 사람들 또한 이곳을 드나들었다고 추정되는 국제타운이었다. 3세기 무렵엔 월지의 후신인 쿠샨제국이 한나라와의 관련 속에 타림분지의 카슈가르 쿠처 호탄 카라샤르 산산 투루판 등의 나라가 명멸하면서 불교를 수용해서 중국에 전파해 주었다.
 
1877년 실크로드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독일의 리히트호펜(Ferdinand Freiherr von Richthofen 1833–1905)은 여행가, 지리학자, 과학자였다. 실크로드란 말은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용, 보편화되었다. 그는 1868년부터 1872년 사이에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여행했으며, 독일의 본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가르쳤다. 후에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한 스웨덴 출신 지리학자인 스벤 안데르스 헤딘(Sven Anders Hedin 1865)은 그의 박사과정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실크로드 전 지역이 우리에게 흥미를 주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곳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둔황이 아닐까 한다. 이제 둔황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자.
 
서구열강은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엄청난 재미를 보고 있던 19세기 말경, 티베트와 중국까지 넘보게 되었다. 인도 전역과 버마 등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파악하고 있던 브리티시는 이제 티베트와 중앙아시아를 넘보기 시작했지만, 이미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쓰고 중앙아시아 남단 깊숙이 진출하고 있었다. 유럽의 지리학자와 역사고고학자들에게 타클라마칸 사막은 신비로운 탐험지역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는 이들에게 신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이미 사라져 버린 나라에서 유물을 찾느라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을 때, 둔황에서 보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것은 바로 둔황 막고굴 장경동(藏經洞)이었다. 장경동은 막고굴에 있는 천불동(千佛洞) 가운데 제17굴의 이름이다.

막고굴은 둔황의 동남쪽 25km에 위치한 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북으로 1,600m에 걸쳐 조성된 막고굴과 서천불동, 안서 유림굴 등 600여 개의 동굴이 있고, 그 안에 2400여 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막고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 십육국 시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 전진(前秦)의 지배하에 있던 355년으로 추정되며, 승려 낙준이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 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벽화의 양식으로서는 오호 십육국 시대 북량과 북위 때에는 서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통치 기간이 가장 긴 당나라 때의 석굴이 225개굴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수나라가 97개를 차지한다. 그 후 몽골과 이슬람의 침입을 거치면서, 둔황은 완전히 쇠퇴해진 도시가 되었고, 막고굴은 7백여 년간 동면에 들어가는 존재가 되었다.  














▲ 장경동 비고(秘庫)에서 둔황문서를 발견한 태청궁 도사 왕위안루.     © 매일종교신문


불교의 동굴사원이었던 이 막고굴은 도교 태청궁 소속으로 후베이성 마청 시 출신인 왕위안루(王圓籙1851-1931)라는 도사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서구에 왕도사(王道士)라고 알려진 인물로 너무나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유럽의 동양학 학자들에게 청나라 황제의 이름은 몰라도 왕도사는 다 알 정도로 유명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1900년 6월 22일 장경동 비고(秘庫)에 숨겨진 서적을 발견하였다.
 
1900년 6월 22일 막고굴에 거주하던 왕도사는 막고굴을 보호하기 위해 기금을 조성하여 대규모의 청소를 단행하였다. 왕도사의 조수가 담뱃대로 제16동(임의로 붙인 이름) 벽을 두르리다가 공명음이 되돌아오는 것을 듣고 왕도사에게 보고를 하고, 그 날 자정 북쪽 복도의 벽을 깨고, 내부를 조사하다가 엄청난 분량의 서적과 그림 등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부는 각각 너비가 2.6m에 이르렀고, 높이 3m의 사각형 별실로 17동(장경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곳에서는 4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11왕조의 유물이 있었고, 특히 16국 북송의 문화 유적들이 5만 점 이상 발견되었다. 전 왕조의 역사서와 서화와 비단위에 그린 그림과 자수 등의 유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유적을 발견한 후, 왕도사는 청조(淸朝)에서 파견한 지방관에게 두 점의 서화를 증거로 가지고 가서, 즉각 보고를 했지만, 어수선한 청조 말기의 상황에서 지방관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왕도사는 지방관이 장경동에 좀 더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랐으나 지방관은 장경동을 방문한 후 몇 점의 서화만 가져가고 장경동을 잘 지키라는 말만 했을 뿐 그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왕도사는 포기하지 않고, 800리나 떨어져 있는 쑤저우(肅州, 현재 간쑤 성의 주취안)까지 여행을 하여, 준비한 두 점의 유물을 보여주었다. 그곳의 관리는 학자였지만, 그 유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장경동의 보존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몇 년 후 지방의 교육관이었던 예창치는 장경동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지방관 왕종한이 가져간 유물을 그의 저서 《유시(語石)》에 소개를 하였다. 1904년 지방 정부는 둔황에 장경동 유물을 보존하라고 명령을 하였지만, 근본적인 조치가 아니라 책임만 지우는 명령에 불과했다.
 
이런 소식은 입소문을 타고 유럽의 동양학자들인 스타인과 펠리오에게도 들어가게 되었다. 스타인과 펠리오가 1907년과 1908년에 각각 방문하였을 때는 왕도사는 지쳐있었고, 그들의 설득에 쉽게 넘어갔다. 결국 유물들은 유럽의 학자들에게 거의 팔렸고, 곧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둔황문서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중국 정부에 의해서 그 가치가 인정되고, 보호가 시작된 것은 1945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965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또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지시로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둔황문서로 탈바꿈하게 되고, 나중엔 실크로드학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학술적 가치가 커진 둔황학(敦煌學)으로 까지 발전하게 된 계기를 만든 두 주역인 스타인과 펠리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스타인은 헝가리출생, 영국의 탐험가로서 영국과 인도 정부의 지원으로 중앙아시아를 세 번 탐사하여 많은 유물을 발굴했다. 둔황의 막고굴 장경동의 유물을 반출해서 연구해 이를 유
 













▲ 아루렐 스타인 경(Sir Marc Aurel Stein, 1862-1943).     © 매일종교신문

 
럽의 학계에 알려 '둔황학(敦煌學)'을 정립한 인물이다. 그는 영국에 귀화하였고, 독일과 영국의 여러 대학에서 이란학과 인도학을 전공하고, 1888년 인도 라호르(현재 파키스탄) 동양학교(Oriental College, Lahore) 교장을 지냈다. 그는 인도 정청(政廳) 고고학 조사부에 근무했는데, 1900년-1901년 동 조사부의 파견으로 신장 지역 각지를 탐험하고, 2번째 탐험 때에는 둔황에서 많은 고문서와 회화를 발견하였으며, 3번째 탐험 때는 하라 호토(Khara-Khoto:서몽골 거연해) 폐허와 투루판 분지에 있는 옛 무덤에서 많은 미술품과 고고학적인 유물 자료를 발견하여, 이것의 상세한 보고서 및 연구 저서로 중앙아시아 연구에 일조했다. 서역을 휩쓴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의 유적도 발견하였다. 1904년 당시 막고굴을 관리하고 있던 태청궁의 도사 왕원록을 설득, 약간의 재정보조금을 지불하고 약 5만점의 유물을 반출했고, 그 가운데 7천점을 영국으로 보냈다, 오늘날 이 보물은 대영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서구 열강의 각축과 내부 분란, 부패 등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청나라 정부와 지방 관리들은 왕도사의 탐사 활동에 대해 무관심했고, 왕도사는 고문(古文)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유물 보존을 위해 엄청난 발품과 노력을 기울였으나 어떤 관리도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을 둔황에서 발견한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     © 매일종교신문












▲ 중국어구사와 한문을 해독했던 폴 펠리오가 장경동에서 둔황문서를 조사하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둔황문서 반출의 또 한명인 프랑스인 중국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그는 중국어를 구사하고 한문을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 중국에 간 것은 외국인 사절단으로 들어가서, 중국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프랑스의 유명한 동양학자 실뱅 레비(Sylvain Lévi)와 에두아르 샤반(Édouard Chavannes)의 제자가 되어 공부를 하였다. 펠리오는 단 한번 중앙아시아를 탐사했지만, 수많은 유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펠리오는 하노이에 있는 프랑스극동학원(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에서 일을 했으며, 그곳에서 학회의 장서 수집을 위해 1900년 베이징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일을 하는 동안 의화단 운동이 발생, 외국인 대사관에 포위당하여 구금되었다. 그는 포위를 당한 동안 두 번을 탈출하기도 했다. 22세의 나이에 다시 하노이로 돌아와 학회의 중국학 교수가 되었고, 나중에 프랑스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폴 펠리오는 중국어를 구사하고 한문을 해독할 수 있어서, 그는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문서만 골라서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다. 스타인이 중국어와 한문을 몰라서 양은 많은데, 학술적 가치는 펠리오보다 떨어진다고 한다. 폴 펠리오는 둔황을 가기 위해서 의료 장교와 사진사까지 대동하고, 모스크바와 타슈켄트와 투르키스탄을 경유, 1908년 신장의 카슈가르에 도착
해서 둔황으로 갔다. 펠리오는 유창한 중국어 솜씨 때문에 현지의 중국인 관료를 놀라게 했고, 중요한 소스를 얻어 둔황문서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도중에 쿠처(구자)에서 소실된 쿠처 언어로 된 많은 문서를 확보했고, 우루무치를 거쳐서 1908년 둔황에 도착해서 왕도사에게 접근했다. 방대한 분량의 고서적과 판본, 예술 작품들이 이미 스타인에 의해 유출된 후였지만, 그의 중국어 실력은 빛을 발휘했다. 3주간 판본과 고서적 등을 씨름하며 분석한 후에 왕원록에게 90 파운드를 주고 막대한 분량을 확보, 1909년 10월 파리로 돌아왔는데, 그가 이때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을 발견했다. 그는 중국학의 대가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소장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파리동양박물관(Musée Guimet)에는 그의 이름을 딴 갤러리가 있다. 원나라의 사신 주달관의《진랍풍토기:크메르 제국역사》를 번역, 서양에 알림으로써, 앙코르 유적의 복원에 막대한 기여를 하기도 했다.
 













▲ 오타니 고즈이     © 매일종교신문












▲ 세르게이 올덴부르크(왼쪽).     © 매일종교신문

이밖에도 둔황문서는 1911년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중앙아시아 탐험을 시작으로 1914년까지 총 3차까지 원정을 했다. 영국 런던에서 유학을 했던 혈기 넘치는 젊은 인텔리로서 일본 정토진종 서본원사(浄土真宗 西本願寺)의 22대 세습법주가 된 인물이다. 둔황과 쿠차 등지의 예술품들을 구입해서 소장을 하고 있었는데, 서본원사(西本願寺)의 파산으로 그 일부를 당시 일본의 재벌인 구하라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1916년 구하라의 고향친구였던 데라우치 총독이 있는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었다. 구하라는 조선광산채굴권을 따냈다고 한다. 이 물품들은 해방 후, 한국 국고에 귀속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오타니의 전체 소장품은 무려 5,000점이나 되었는데, 그 중 3분의 1은 일본에, 나머지 3분의 1은 한국에, 나머지는 중국 뤼순(旅順)에 분산되었다. 승려였던 오타니는《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혜초가 당나라 승려가 아니라 신라의 학승이라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 중국의 고문학자(古文學者) 라진옥.     © 매일종교신문

 
러시아 동양학자이면서 불교학자인 세르게이 올덴부르크(Sergey Fyodorovich Oldenburg 1863-1934)의 인솔아래 1914년 러시아 탐험대가 둔황문서를 획득했다. 중국의 고문학자(古文學者) 라진옥(罗振玉 1866-1940)이 1909년 펠리오가 획득한 둔황문서(敦煌石室遺書:Manuscripts of the Dunhuang Caves)를 번역 편집.발간했다.
 













▲ 둔황 막고굴 장경동에서 폴 펠리오가 발견한 혜초의《왕오천축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     © 매일종교신문


둔황은 사막과 오아시스로 되어 있는 서역(西域)의 입구이다. 둔황에 가면 중국보다는 서역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고 중국과는 다른 환경을 만나게 된다. 막고굴 장경동에 있었던 둔황문서는 실크로드문명의 총 결집이다. 둔황문서를 사료로 해서 ‘둔황학’이 성립되고, 영국런던 대영박물관내에 ‘국제둔황프로젝트’가 1994년에 설립되어서 종합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베이징 베를린 둔황 교토 파리 성 피터즈버그와 서울에 분원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도 오타니 고즈이가 수집한 둔황문서와 유물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에 1700점의 유물과 60점의 벽화 조각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국제둔황프로젝트 참여국가가 되었다.(계속)
(이치란 해동세계선림원 원장 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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