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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관리자
Subject   한국불교포교어떻게 할것인가-7 고승과 석학 출현을 기대하며 김안수 포교사

고승과 석학 출현을 기대하며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종교인구가 많이 감소하고 있다는 보도이다. 종교인구가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여론조사 통계결과이다. 불교 또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는 보도이다. 미국에서도 종교인구가 줄어든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무려 750만 명이 종교를 떠났다는 보도인데, 사실인 것 같다. 그만큼 인간 지성이 밝아지고 있다는 증거이겠지만, 무종교로 사는 것에 오히려 부담감이 없고, 현대인의 삶이 사회경제적 틀에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된 것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그 책임과 답을 말해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불교와 같은 과학적인 종교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뭔가 세인들의 이해부족이라고 보지만, 세계적인 추세라서 다소 함께 겪는 면이 없지 않다. 본국의 종교 인구가 전반적으로 감소한다고 할지라도 불교가 특히 심한 것 같아 우려스러운 마음이다. 그동안 한국불교는 너무 안일무사하게 포교의 질적 중요성을 망각해 온 것 같다. 항상 불교신자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사람들이 나이 들면 저절로 불교를 찾게 될 것이라고만 믿어 온 탓이리라. 시대의 사회 지성적 흐름을 예측하지 못한 전법포교로 구태의 형식에서 맴돌았을 뿐, 벗어나지도 못했고, 너무나 소홀했던 것이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이제 한국불교에서의 전법포교는 새로운 방식이 요구되는 것으로써 발등에 떨어진 불이됐다. 그간 너무 기복적인 방편만을 지나치게 써먹다보니, 사회적 지성이 널리 계몽되어 이를 용납하질 않아, 이제는 바닥이 드러난 결과를 맞고 있는데, 참으로 교계 지도층의 전법포교에 대한 밝은 예견과 미래전략을 미리 갖추지 못하고, 등한시해온 것을 이제 와서 통탄할 뿐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결과이다. 통찰력의 부족이라고나 할까, 포교전략의 부재였다고나 할까, 아니면 무능한 포교행정의 결과라고나 해야 할는지 모를 일이다. 본국불교나 미주불교나 이제 고승과 석학이 출현해야할 시점에 다다르고 있다고 본다. 불교의 목적은 중생의 깨달음(무명을 밝혀 명으로 거듭남)을 향해 전법포교에 나서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몸소 저잣거리를 마다않고, 길거리로 나섰던 부처님의 행적을 우리는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중생의 현장이 무슨 고난이지도 모르면서, 문제의식이 전혀 무관한 동떨어진 것의 깨달음에 집착한 나머지 그런 수행(대중외면)에만 평생을 보낸다면, 현대인의 고난을 극복할 해답의 합당한 전법포교는 어디에서 찾으며, 누가 한단 말인가. 아무리 포교사의 숫자가 많다고 한들, 한 분의 선지식의 출현에 비견하겠는가. 또한 비록 세속에 머물지만, 지성과 양심을 가진 대석학이 출현해서 길을 제시해 줄 때가 된 것이다. 아무리 현학적인 관념적 논문을 쏟아낸다고 해도, 중생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자신만을 위한 소수의 서클 멤버를 위한 글 장난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전통에서 보면, 선지식은 선.교.율(禪敎律)을 두루 갖춘 분이었다. 이런 선지식을 표상으로 삼아왔다. 근래에 와서는 이런 기준이 무너지고 있다. 오직 선(禪)만을 강조한다거나, 교(敎)만을 강조한다거나 아니면 극히 소수이지만 율(律)에만 집착하는 편향된 어느 한쪽만을 지향하는 풍토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선교율의 종합적인 수행자 상이어야만 선지식으로서의 고승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석학도 그렇다. 어문사철(語文史哲)이란 인문학의 본령을 두루 갖춘 석학이라야 하는데, 한국불교는 지금 너무 철학적인 관념론에 치중되어 있어서 절름발이와 같은 편견과 자기 서클의 회원만을 위한 논문을 생산하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겠다. 어떤 석학인가. 민생-경제(새로운 보시철학의 사회복지 기능의 확대)의 대안을 아울러 제시할 수 있는 불교적 석학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무명을 밝힌다는 것, 무엇을 밝히는 것인가, 사회적 무명을 계도(啓導)할 수 있는 가르침, 결국 반야(중생제도)의 무무명-명은 사회적 무명이 제거된 현실적 밝은 인생의 삶이 구현되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계속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대승이 지향하는 것일 텐데, 개인적 무명으로만 회자되는 오늘날 한국불교가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종교의 구원이 현실에는 없고 내세만을 위한 것에서, 세인의 관심이 종교심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당장 현실적 해결은 경제문제에 있는데, 열심히 일해도 항상 궁핍을 감내해야만 하는 생활로 그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노고, 사기 착취하는 자가 버젓이 행세하는 모습에서 나만 홀로 어떻게 착하게만 살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가 종교의 무력을 인정하게 되어 외면되는 결과일 것이다. 왜냐, 오직 민생경제문제는 곧 정치문제로 해결돼야 한다는 국민적 지성이 모아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이른 시장 자본주의 병폐가 주는 가진 자의 것이 합당하게 그리고 균등하게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 사회구조적 환경에 못마땅한 마음이 움터 결국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는 의식이 자신의 종교성까지를 버리는 종교이탈 현상으로 빚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종교가 마음의 치유는 가능할지 모르나 마음만 다잡아먹는다고 해서, 땟걸이나 환경주거가 안전하지 못한 가난한 자의 삶이 돈이 없으면 잠시도 머물수 없는 사회적 공간에서 어디서 편안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문제까지를 불교가 안고 사회복지 차원에서 새로운 경제구조(승가는 감시기관 그리고 재가는 운영기관으로서의 승속공동체)의 일터를 창출해 줄 수 있는 방도는 없는 것일까. 일본불교는 일찍이 불교사회복지사업을 통해 일본식 불교가 사회를 계도하고 있질 않는가. 달리 한국불교도 종단차원에서 사회적 복지기능의 자연환경 보존 보급지로서의 쾌적한 치산치수의 조림환경이나 국민의 경제식수를 넉넉하게 해 줄 수 있도록 할 산간 문화재 자연환경 터를 가지고, 일자리를 잃은 비불자들에게까지 확대해서 불교수행 체험을 겸한 새 환경 일터를 환경복지사업차원에서 창출해 낼 수는 없는 것인가 해서 하는 말이다. 이제 불교는 사회를 등진 안목으로는 온전히 설 땅이 없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불교학이란 전인적인 종합 지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구의 분석적이고 각론적인 전공학문이 과연 불교라는 종교에도 적용이 되는지 한번 깊이 숙고해 볼 문제이다. 진정한 선지식으로서 선교율을 갖춘 고승대덕과 종합적인 불교지식을 갖춘 석학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제월 김 안 수 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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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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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