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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성지를 가다(인도)⑤ - 바이살리, 제2차 경전결집회의와 유마거사의 재가불교

1 ▲ 바이살리의 상징으로 아소카 석주 주두(柱頭).     © 매일종교신문 바이살리(Vaiśālī)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직접 관련이 깊은 곳이다. 고타마 붓다가 다섯 번째 안거(安居)를 이곳에서 보냈으며 생전에 수차례 들려서 설법한 곳이고, 말년에 쿠시나가라로 가기 전, 최후의 설법을 한 곳이다. 고타마 붓다가 열반하고 100년 후인 기원전 383년에 칼라소카 (King Kalasoka) 왕의 후원으로 제2차 경전결집(經典結集)을 한 곳이기도 하다. 바이살리는 고타마 붓다 당대에, 16대국 가운데 하나로서 밧지(Vajji)족과 리차비(Licchavi)족 등, 8개의 종족(種族)이 연합하여 세운 공화국이었다. 고대인도의 유명한 산스크리트 문법학자인 파니니(Pāṇini 4세기BCE)가 언급할 정도로 바이살리는 번영을 구가했던 나라였다. 자이나교의 제24대 티르탄카라(Tirthankara 정신적 首長)로서 자이나교의 실질적인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마하비라(Mahavira)가 이곳에서 기원전 599년에 탄생하여 자이나교 사원에서 성장한 도시다. 불교와 자이나교와 깊은 관련이 있고, 아시아의 사자로 알려진 아소카 석주의 사자주두(獅子柱頭)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다.   고타마 붓다는 생전에 이 도시를 자주 찾았고, 7천 7백 개의 공원과 연꽃 못이 있을 정도로 부와 번영이 넘치는 곳으로 부유한 창부(唱婦)였던 암바빨리카(Ambapālika)가 고타마 붓다에게 귀의하여 정원을 헌증하고, 아라한이 된 곳이기도 하다. 바이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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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 가야=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


모든 종교는 창교자(創敎者)와의 관련된 사적(史跡)을 갖고 있다. 창교자의 고향일수도 있고, 처음 그 종교를 열개된 장소나 어느 특정한 사건과의 관계된 지역이 될 수도 있다. 불교에 국한해서 보면, 교조(敎祖) 석가모니 부처님과 연관된 지역은 인도(네팔 포함)가 된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과 관계된 성지를 4대(大) 주요 성지(聖地)와 4곳의 특별 부가성지(附加聖地)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 4대 성지라고 하면, 보드가야, 쿠시나가르, 룸비니와 사르나트를 일컫는다. 보드 가야(Bodh Gaya)는 인도 비하르 주에 있고,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곳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하고서 부처(覺者)가 되었다. 쿠시나가르는 보드 가야로부터 2백 km 이상 떨어진 북쪽인 웃따르 프라데시 주(州) 고락푸르 시에서 50km 떨어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처는 보드가야에서 성도한 후, 45년간 설법(說法)을 마치고 고향 근처의 당시 큰 나라의 도시인 코살라국의 스라바스티(사위성)로 가던 도중,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이곳에서 빠리닙빠나(대열반)에 들었다. 이곳 쿠시나가르에서 인도 네팔 국경을 지나면 룸비니가 있다. 부처는 이곳에서 탄생했다.

다음은 사르나트인데, 바라나시 남쪽 12km 지점에 있는 녹야원(鹿野園 사슴동산)이라는 곳인데, 보드가야에서 직선거리로 2백km가 넘는 거리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정각(正覺)을 이룬 다음, 자신의 도반(道伴)이었던 다섯 명의 비구들을 찾아가서 최초로 설법하여 이들을 제자로 삼았다. 불교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 혼자만이 그 깨달음을 만끽하면서 전법포교하지 않았다면 불교란 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이 최초의 설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르나트를 불교 4대 성지에 포함시키고 있다.
  
다음은 4곳의 특별 부가성지이다. 라지기르(Rajgir), 산카사(Sankassa), 스라바스티(Sravasti)와 바이샬리(Vaishali)를 말하는데, 라지기르는 왕사성(王舍城)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이 주로 머무르시고 설법한 당시 16 개국 가운데 강대국의 하나인 마가다 나라의 수도(首都)였다. 이 왕사성에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하는 영취산이 있고, 부처님은 성도한 후, 이곳 산정의 토굴에서 명상을 하면서 제자들을 지도했고, 중국 한국 일본 선종불교에는 매우 상징성 있는 산이다. 부처님 당대에 도보로 보드가야에서 반나절이면 이곳에 이를 수 있는 곳이었다.

보드 가야의 강가나 영취산에는 당시 많은 출가(出家) 무소유(無所有)의 사문(슈라마나)들이 도를 닦던 곳이었다. 산카사는 델리와 스라바스티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처님께서 아비담마(불교심리학)를 설했다고 알려졌으며, 어머니인 마야 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하여 천도한 곳으로, 아소카 왕이 이곳에 석주(石柱)를 세웠고, 한 때는 승원(僧院)과 대탑(大塔) 등이 있었고, 많은 비구들이 살았었으나, 지금은 석가족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스라바스티(舍衛城)는 부처님 재세(在世) 시(時)에 코살라국의 수도였으며, 부처님 45년 설법 기간 25안거(安居)를 이곳 기원정사에서 보내시고, 이곳에서《금강경》을 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바이샬리는 부처님 당대에 크고 부유한 도시였고, 부처님이 열반하기 전, 최후의 설법을 한 곳이다. 이상의 8곳을 불교 8대 성지라고 말한다. 부처님과 직접 관련된 장소들이다.
  
차례로 소개하기로 하고, 이밖에도 부처님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곳으로는 데바다하(Devadaha), 가야(Gaya), 카필라와스투(Kapilavastu), 케사리라(Kesaria),코삼바( ·Kosambi), 날란다(Nalanda), 파와(Pava),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와 바라나시(Varanasi)가 있으며, 후에 불교와의 관련이 있는 주요 불적지인 아잔타 석굴(Ajanta Caves), 바라바 석굴(Barabar Caves), 바르훗(Bharhut), 엘로라 석굴(Ellora Caves), 랄릿트기리(Lalitgiri), 마투라(Mathura), 판다블레니 석굴(Pandavleni Caves), 피프라화(Piprahwa),라트나기리( Ratnagiri), 산치(Sanchi), 우다야기리(Udayagiri)와 비크라마실라(Vikramaśīla) 등이 있다.
  
불교에서는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8대 성지가 있고, 그 밖의 불교관련 유적지가 많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지는 단연 부처님이 성도한 보드 가야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달음을 제일로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세계의 여러 전통의 불교 종파에서도 깨달음을 우선시한다. 세계 각 나라의 출가 사문이나 불자들은 인도의 불교성지 가운데서도 보드 가야를 가보고 싶어 한다. 이곳의 지명이 말해 주듯이 부처님의 각신(覺 身)이 이곳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성도하고 열반(入寂)한지가 어언 2559년이 되었지만,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룬 이곳 보드가야에서 뭔가 그 깨달음에 대한 기운을 받고 영감을 얻으려는 불교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잠깐 부처님 생몰연대에 대해서 알아보자. 올해가 불기 2559년인데, 이 기년(紀年)은 입멸(入滅)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부처님은 기원전 563년에 태어나서 기원전483년인 80세에 돌아가셨다. 기원전 483년부터 기산하면 올해가 2559년이 되는데, 인도나 스리랑카에서는 부처님께서 입멸한 해를 1년으로, 태국은 0년으로 기산해서 1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아무튼 불기 2559년은 탄생년(誕生年)이 아니고 돌아가신 입멸년(入滅年)이라는 것을 참고로 알아두었으면 한다. 많은 분들이 혼동을 하는데, 불기는 부처님이 돌아가신 입멸(入滅)년을 기점으로 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열반(니르바나)을 중시한 연유에서다.
  
인도라는 나라는 역사기록에 둔한 사람들이었다. 인도역사를 복원하기위해서는 페르시아나 중국 그리스 로마에서 소스를 찾기도 한다. 기원전 3천 년 전에 어쩌면 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아리안이라고 하는 침입자들이 이란 고원을 경유하여 인도 평원을 점령하여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정착한 나라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비(非) 아리안이라는 설도 대두하지만, 서구의 학자들에 의하면 인도유럽어족의 아리아인임이 정설이라고 한다. 대체로 부처님과 당대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이 세운 석주나 바위에 새겨진 칙령 등에 의거해서 연대를 추정한다. 그리고 가장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사서(史書)는 인도 남단의 섬나라 실론에서 빨리어로 기록된《마하왕서(Mahavamsa大史)》,《디파왕서(Dipavamsa島史》와《Mahavamsa》를 이어서 기록된《小史Cūḷavaṃsa 쭐라왕서》이다.

《Mahavamsa》는 실론의 왕들에 의해서 빨리어로 쓰여 졌다. 기원전 543년 인도 벵갈에서 실론으로 온 비자야 왕자이야기부터 실론 아누라다뿌라의 마하세나 왕(334-361)에 이르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Dīpavamsa》는, 기원후 3세기에 편집된 것으로서 실론과 인도 고대사가 기록되어 있고, 불교의 부파(종파)에 대한 기록 등이 있는 아주 중요한 사서이다.《Mahavamsa》를 이은《Cūḷavaṃsa》는 《Mahavamsa》의 연속적인 사서이다. 기원후 4세기부터 1815년까지의 기록이다. 6세기에 마하나마 라고 하는 비구가 기록한 사서로서《Mahavamsa》와 함께 실론의 2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상좌부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겐 필독서이다.

독일의 윌리엄 가이거라는 학자가《마하왕서》는 1912년에 《쭐라왕서》는 1930년에 번역을 완료했고, 영역되어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발행되어 영.독어권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영역서는 1837년에 출간되어 실론의 직할 식민 통치에 활용되었다. 이 역사서는 경전(經典) 텍스트는 아니지만, 상좌부(上座部) 불교를 공부하는 데는 필독서이다. 실론의 초기 종교사(불교)이며, 고타마 싯다르타(부처님)와 인도 고대시대 불교, 부처님 열반 이후 경전결집(經典結集) 역사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서에 근거해서 보드가야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보드 가야는 우루벨리라고 알려진 네란자나 강둑에 위치하고 있다. 부처님이 입멸한지 2백년 가량 지나서 인도 亞 대륙을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이 처음 이곳을 방문하고 아소카 석주를 세우고 사원을 세워서, 비구들이 거처하게 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63년에 지금의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해서 29세 때 출가하여 6년 후인 35세인 기원전 534년에 대각을 이루고 부처가 되었는데, 정각을 이룬 장소가 바로 이곳 보드가야 네란자나 강둑 보리수 아래서이다. 이 보리수 아래의 장소를 금강보좌(金剛寶座 Vajrashila)라고 한다. 아소카 대왕은 이 보리수를 의지해서 대탑(大塔) 사원을 건립한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다른 장소에서 거의 6년간 고행을 하다가 이곳 보드 가야의 보리수 아래로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숭고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아서 성도(成道)를 이룬 것이다. 깨달음의 내용은 불교의 교리적이고 철학적인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연기법(緣起法)과 중도(中道),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제(四諦 진리란 뜻의 제로 읽음), 삼법인(三法印)인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나중에 불교교리 발달과 사상의 전개가 심원해졌지만, 당대로서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전지(全知)의 경지로서 깨달은 자로 숭앙(崇仰)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처음 고행을 시작할 때, 다섯 명의 사문들과 함께 했는데, 6년간 고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영양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그로기 상태에서 겨우 우유죽을 공양 받고 정신을 가다듬어 정진한 끝에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부처의 지위에 올랐다. 보리수 아래서 명상을 할 때, 전에 같이 수행했던 도반들이 찾아와서 고타마 싯다르타의 모습을 보고서 그들은 이제 고타마는 극도의 고행을 버리고 손쉬운 명상을 한다면서 곁을 떠나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성도한 다음, 이들 비구들을 찾아서 녹야원까지 가서 이들을 제도하여 제자로 삼았지만, 보드 가야 시절에서는 어쩔 수 없는 사건이었다. 또 당시 인도에서의 수행자들은 극도의 고행을 수행의 방법으로 삼았는데, 하루 한줌의 물과 음식과 수면을 조금 밖에 취하지 않으며 나무 이래나 동굴 등에서 생활하고 몸도 헝겊 조각을 이어서 만든 옷을 입을 정도였는데, 이 옷은 나중에 분소의란 가사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 대왕이 이곳 보드 가야의 부처님 성도지(成道地)를 참배하고 부처님의 위대함을 칭송하여 기리기 위해서 최초로 대각사(大覺寺 Mahabodhi Temple)를 세운 이후, 지금에 이르기 까지 마하보디 사원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의 모습으로 세계불교도들 앞에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원은 인도 역사와 함께 흥망성쇠를 같이 했으며 인도 종교사의 살아있는 증표처럼 불교사원에서 힌두사원으로 힌두사원에서 이슬람의 파괴로 다시 힌두 승려들의 관리 하에 다시 불교도들의 손에 들어오기 까지 그야말로 온갖 시련과 험한 상황을 견디면서 지탱해 왔다. 2013년 7월 7일 새벽에는 폭탄이 터졌는데, 다섯 명이 다치는 등, 자칫했으면 큰일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인도정부 조사원회에서는 이슬람 지하드 그룹의 인도 무자헤딘의 책임으로 결론지은 바 있었다.
  
보드 가야 대각사의 역사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성도한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 약 1천 년 간을 1기로, 기원후 5세기에서 1420년경 까지를 제2기, 1420년경부터 현재 까지를 제 3기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가장 전성기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15세기부터 보드 가야 대각사는 모든 사람들의 시야에서 묻히고 말았다. 보드가야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세기 브리티시 인디아의 고고학 발굴 때문이었고, 보드 가야 대탑(대각사)이 다시 불교도들의 귀의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실론(스리랑카) 출신 불교 지도자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의 인도불교성지 복원운동 단체인 대각회 활동 때문이었다.
  

▲ 대각회를 창립한 실론의 불교부흥운동가 스리맛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Srimath Anagarika Dharmapala1864-1933). 그는 입적하기 전 비구가 되었     ©매일종교신문  

  
근현대의 보드 가야 역사에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란 인물을 빗겨 갈 수가 없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실론 출신으로서 미국의 신지학회(神智學會) 회장인 스틸 올코트 대령의 근대불교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브리티시의 저널리스트이며 시인이었던 에드윈 아널드의 도움을 받아 1891년 대각회(Maha Bodhi Society)를 창립했다. 창립목적은 인도불교의 소생과 고대불교유적지인 보드 가야(Bodh Gaya), 사르나트와 쿠시나가라 등지의 불교유적을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왜 실론 출신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이렇게 불교성지를 복원하려고 대각회(大覺會)를 창립하게 되었는가.
  
불교가 인도에서 거의 소멸한 다음에는, 일부 불교도들조차도 자신들이 ‘불교도’라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만큼 인도불교계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인도에서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라다크 불교협회, 전(全)아쌈불교협회, 히말라야불교회와 달리츠(불가촉천민) 불교운동 등에 주목해서, 이들을 이끌어 줘야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아나가리카(anāgārika)란 말의 뜻은 ‘집 없는 자’의 의미이다. 집이 없는 자란 바로 출가 수행자를 의미한다. 다르마팔라(Dharmapala)는 불법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법호(法護)란 뜻 정도의 의미이다. 상좌부 불교의 전통에서 아나가리카는 출.재가(出在家)를 막론하고 집을 떠나서 수행의 길로 들어선 구도자(求道者)를 이렇게 불렀다. 불교가 아사직전이었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실론불교에는 이런 수행자들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출가 비구와 재가 신도사이의 중간 정도의 신분인 우리식으로 말하면 포교사나 법사(法師) 정도의 위치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신도는 5계를 지키고, 출가 비구는 227계(대승에서의 빅슈는 250계)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나가리카는 8계(戒)를 지키도록 되어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황색 가사는 입지 않았고 삭발도 하지 않았지만, 8계 이상의 계율을 지키면서 실론의 곳곳을 누비며 수행과 불교 부흥운동을 했다. 입적을 얼마 앞두고 비구가 되긴 했지만.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에드윈 아널드 경(Sir Edwin Arnold )의《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노래한 담시(譚詩)에 감화를 받아서 1886년 인도 보드 가야 행(行)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큰 충격을 받게 되는데, 불교도의 사원인 대각사가 힌두 승려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불상은 힌두교의 한 신상(神像)으로 변해서 한쪽 구석에 안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잠겨있는 빗장을 열고 들어가서 참배할 정도였다. 이에 그는 흥분했고, 이들에게 항의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에게 불가항력이었다. 그는 실론에 돌아와서 즉각 콜롬보에서 대각회를 설립했고, 이듬해인 1892년 캘커타로 본부를 옮겼다. 캘커타는 당시 브리티시 인디아의 수도였다. 첫째 목적은 보드가야의 대각사를 비롯한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룸비니 등의 관리 운영권을 힌두 승려에서 불교도가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르마팔라는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의 여러 단체로부터 초청을 받기도 했다. 하와이에서는 카메하메하 (Kamehameha the Great 1738-1819) 대왕의 후손인 마리아 E. 포스터 여사를 만나서 엄청난 액수의 보시를 받게 되는데, 그가 받은 백만 루피는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거의 미화 3백만 불 상당이다. 그는 이 돈으로 대각회 운동에 크게 활용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한국에서 인도로 가서 공부한 승려들을 인도구법승(求法僧)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가장 먼저 간 분이 중국 동진 시대의 법현(法显 Faxian 337–422)법사 이다. 그는 399년부터 412년 까지 13년간 지금의 신장자치구인 타림 분지를 지나서 인도에 들어갔고, 보드가야를 포함한 인도의 여러 불적지를 참배하고 실론 섬까지 가서 당시 유명한 아바야기리(무외산사)라고 하는 큰 절에서 연구한 다음, 해로(海路)로 사경을 헤매면서 중국으로 돌아와서《법현전》이란 책을 남겼고, 7세기 당나라 현장법사(玄奘 Xuanzang 602–664)는 629년부터 645년까지 타림분지의 천산의 오아시스로(路)인 실크로드를 통과하여 인도 날란다 대학에서 16년간 공부하고 육로로 귀국해서《대당서역기》를 남겼다. 그 후 중국에서는 의정법사(義淨,Yijing635-713)가 해로를 통해서 지금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을 거쳐 인도에 갔고, 해로로 귀국했으며, 25년간의 여정을 기록한《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과 인도 등지에서 유학한 중국 한국 일본 등의 구법승들을 기록한《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등을 남겼는데, 날란다대학에는 신라에서 온 유학승들이 여러 명 있었다고 이름을 남기고 있다. 혜초(慧超704-787)는 신라 성덕왕 때의 고승이다. 혜초는 해로로 가서 육로로 돌아와《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그의 인도기행문이 1908년 둔황에서 발견되어 동서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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