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것저것 겨울 날 준비를 해가지고 진불암 앞에서 포즈를 취한 원산스님 화두 이야기를 더 해보자. 화두 이야기를 하면 고안이란 말이 따르게 된다. 그래서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공안이란 관청의 공문서를 말한다. 관청의 공문서는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화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가 "이것이 무엇인가(是什麽)?"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물론 불성이다. 즉 선불교에서 수행의 핵심은 불성을 보는 것, 즉 견성(見性)이기 때문이다. 이 화두의 일반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다 :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한 물건'이란 불성을 가리킨다.) 본래부터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하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나 항상 작용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불교의 근본진리, 즉 불성을 가리키는 언사는 원칙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선불교에서 전승해 온 화두의 예로는 수천 가지가 있다.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하나는 일상적 사물을 그대로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논리적인 언사를 구사하는 것이다. 일상적 사물을 가리키는 예로 대표적인 것은 "뜰 앞의 잣나무"이다. 이 말은 곧 "불교의 근본 진리는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잣나무는 불성이 구현되어 있는 현상이라는 식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화두 참구의 본령이 아니다. 도대체 불교의 근본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답이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답은 답이면서 답이 아니다. 답이기 때문에 그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답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 의심을 푸는 것이 화두를 참구하는 선불교의 수행이다. 다음으로 비논리적인 예로는 "남산에 비구름이 있는데 북산에 비가 온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도대체 상식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이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불성의 당체가 우리의 언어와 사유의 법칙에 반하며 그것을 초월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역시 묻는 이로 하여금 강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만약 이 화두를 깊이 참구하는 중에 홀연히 그 의심이 풀려서 그렇게 말한 스승의 마음에 계합(契合)할 때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이치로 따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직 스승의 그 말 자체를 의심하는 것만이 요체가 된다. 선불교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가르침인 것은 이렇게 화두를 통해 스승의 마음을 전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불암 감원 원산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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